성경 사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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여리고
요단 계곡의 사해 북서 방향 약 16km에 위치한 중요한 성읍. "종려의 성읍", "종려나무 성"(신34:3; 삿1:16; 3:13; 대하28:15)으로 불리는 성경의 여리고는 두 부분 - 가나안/이스라엘 시대와 하스모니아/헤롯 성읍의 시대 - 으로 나눌 수 있는 감동적이고 중요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.
여리고는 요단강 근처, 모압 서쪽(예. 민22:1; 수13:32), 동부 베냐민의 산에 근접한(수2:16,22), 에브라임과 베냐민의 영토를 구분하는 경계에(16:1-2), "여리고 평지"로 언급되는 비옥한 지대에 위치한다. 여리고는 예루살렘 동북동쪽으로 28km, 요단강 서쪽으로 11km에 있다. 주위 환경은 쾌적하였으며, 고대 저술가들은 그 곳의 종려나무와 발삼 나무를 칭송하였다(참조. 근처의 오아시스, 아인 에스-술탄).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그 이름이 "향기나는 장소"를 뜻한다고 해석하기도 하고, 다른 사람들은 그 곳에서 서(西)셈족이 숭배한 달의 여신을 시사하고 있는 "달의 성읍"이라는 의미로 추측하기도 하였다(참조. "야레아흐").
I. 성경의 언급
여리고는 주요 동서 무역로를 끼고 있었으므로 중추적인 상업 도시가 되었고, 그 전략적 환경 때문에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넌 후 그 곳을 주요 정복지로 삼았을 것이다. 이스라엘 정탐꾼이 기생 라합을 만난 곳이 이 곳이었고, 그 후 백성은 "여리고 앞으로" 기적적으로 갈라진 요단강을 건넜다(3:14-17). 6:20에 의하면, 여리고 성벽은 하나님의 궤를 멘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팔을 불자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. 여호수아의 군대가 그 성을 멸하고(21절; 참조. 히11:30), 그 곳은 베냐민에게 분배되었다(수18:12,21). 사사 시대 동안에, 모압 사람 에그론은 이스라엘을 억압하려고 여리고를 정복하였다(삿 3:13).
나중에 여리고가 암몬 지배 아래 들어갔을 때, 다윗은 이스라엘과 우호적 관계를 맺은 부왕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새 왕 하눈을 위로하려고 사절단을 보냈다. 그런데 하눈이 그 조객의 수염 절반을 깎아 수모를 주었으므로 사절단은 수염이 자랄 때까지 별 수 없이 여리고에 머무르게 되었다(삼하10:1-5; 대상19:1-5).
아합 시대에(B.C. 9세기) 그 성읍은 벧엘 사람 히엘에 의해 재건되었는데, 그 기초를 놓을 때 맏아들을 잃었고 문을 세울 때 막내아들을 잃었다(왕상16:34). 이리하여 여호수아의 저주가 그대로 이루어졌다(수6:26). 그 후 얼마되지 않아 엘리사는 여리고에서 선지자의 생도를 만났고 그의 선생 엘리야가 곧 떠나가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(왕하2:4-5). 이 곳에서 그는 엘리야의 후계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(15-18절), 첫 번째 기적을 행하였다(19-22절). 수리아,에브라임 전쟁 기간에(B.C. 734년경), 에브라임 지파 족장들은 여리고에 있는 유다의 사로잡힌 자들에게 휴식을 주었다(대하 28:15).
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느부갓네살의 침공을 피하였을 때 이 곳 여리고에서 바벨론 군사에 의해 사로잡혔다(왕하 25:5-6; 렘39:5-6; 52:8-9). 바벨론 포로기 이후 귀환자들이 여리고를 다시 차지하게 되었고(스2:34), 그 거민은 예루살렘 재건을 도왔다(느3:2).
공관 복음서는 예수께서 여리고 성 밖에서 소경을 눈 뜨게 한 세 기사를 담고 있다(마20:29-34; 막10:46-52; 눅18:35-43). 예수님은 여리고에서 세리 삭개오를 만났고(19:1-10),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을 그 무대로 삼고 있다(10:30).
II. 고고학
텔 에스-술탄에서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점령한 증거와, 성벽에 혼신의 주의를 기울인 대대적인 발굴 작업이 행해졌다
(C.Warren, 1867; E.Sellin과 C.Watzinger, 1907-1909; J.Garstang, 1930-1936; K.M.Kenyon, 1952-1958). 여리고는 중석기 시대(Mesolithic period)에 맨 처음 점령되었고(B.C. 9000년경), B.C.8000-60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된 돌벽은 여리고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시(城市)라는 전승을 뒷받침하고 있다. 다른 점령 시기는 중석기 시대(B.C. 4000년), 초기 청동기 시대 제 1기(B.C. 3200-2800년경), 중기 청동기 시대 제 1기(B.C. 2100-1900년경)와 제 2기(B.C. 1900-1500년경)로 추정되어 왔다.
가르스탕(Garstang)에 의하면, 두꺼운 외벽과 벽돌로 된 방어 내벽으로 이루어진 이중 성벽은 B.C. 1400년경 이스라엘 사람 목전에서 무너진 것이었다. 그러나 케년(Kenyon)은 이에 반박하여 이 유적은 사실 여호수아 훨씬 이전의 두 성벽이었다고 주장한다.
실제로 이 성읍에 대한 포괄적인 증거의 결여는 B.C. 14,13세기 또는 그 이후 청동기 시대(이스라엘)의 점령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. 이로 인해 여호수아의 여리고 정복을 지지하고 있는 학자들은 계속 난감함에 처해 있다. 그러나 가능한 설명으로는 부식 작용 또는 유적지를 없앤 다른 세력 또는 그때 그 자리가 사실 그 지역에 있는 또 다른 구릉(tell)이었다고 하는 다소 불명확한 가능성 등이 거론되고 있다.
여리고는 분명히 B.C. 8세기까지 점령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. 성벽이 없는 잔존한 유적지는 B.C. 7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. 그 자리는 B.C. 6세기 초엽 바벨론 침략 이후 방치되었다. B.C. 2세기에 정착지가 다시 툴룰 아부 엘 알라이크(Tulul Abu el-"Alayiq)에 세워졌다. 이 곳은 구약의 여리고성 남쪽으로 약 1.5km 떨어진 와디 켈트(Wadi Qelt)의 두 제방을 따라 위치하였다. 하스모니아 왕조의 왕은 이곳을 그들의 겨울 휴양지로 정하였고, 헤롯 대왕은 "신약의 여리고"와 그 곳의 왕궁, 지표가 낮은 정원, 영빈관, 로마식 목욕탕, 공공 건물까지 포함하여 호화롭게 단장하였다.
A.D. 68년경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한 점령을 여리고는 면하였다. 여리고에 대한 계속된 점령의 증거는 바르 코크바(Bar KoKhba, 132-135년)와 보르도 순례단(Bordeaux Pilgrim, 333년)시대로 추정된다. 그 이후 얼마되지 않아 동쪽으로 1.5km떨어져 있는 어떤 비쟌틴의 성읍이 이 자리를 차지하였다. 현 여리고(아랍. "에맄하")는 이 자리에 위치한다.
* 참고 문헌
K.M. Kenyon, Diggign Up Jericho(New York:1957); Kenyon et al., "Jericho", EAEHL 2:550-575.
